서울시 강동구 성내로6길 14-23, #302 kkim.samuso@gmail.com 050-6789-4614
ⓒ2022-24 김가은미술사무소
흐르며 뻗어나가는
Flowing and Stretching Out
김가은
냇가를 따라 물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흐르듯, 나무의 가지가 환경 조건에 맞추어 불규칙적으로 뻗어나가듯, 반복과 순환의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역동적 리듬을 감각할 수 있을까. 이윤숙과 박재연이 참여하는 《흐르며 뻗어나가는》은 팽창과 발전의 의미에 사로 잡혀 있던 성장이라는 단어를 자연 생태계가 보여주는 생명력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
식물의 성장, 신체의 성장, 내면의 성장, 경제의 성장 등 ‘성장’이라는 용어는 일상 속 여러 가지 상황에서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는 근대 이후 형성된 태도로 보인다. 계몽주의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현대사회는 대상을 분석하고 결과를 예측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생산과 소비 활동의 지속적인 팽창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가치관 속에서 ‘성장’이라는 용어는 전진, 발전, 개선의 의미와 결합해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대상의 일부만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사고 체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아이의 성장을 키와 몸무게의 증가로, 개인의 성장을 승진이나 재산의 확대로, 국가 경제의 성장을 GDP 증가로 파악하는 이와 같은 시각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여러 질적 변화들을 주변부로 소외시키며, 존재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성장을 자연 생태계의 맥락에서 접근해보면, 그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단편적이거나 목표 지향적인 특성과는 거리가 멀다. 생태적 변화는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기보다는 외부 환경과 반복되는 상호작용 속에서 순환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성장을, 직선적이고 하나의 방향성을 갖는 고정된 개념과는 다른 다층적이고 비선형적인 변화로 인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와 같이 성장이라는 개념을 재정립하거나 확장하려는 접근은 성장의 또 다른 긍정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더 나은 것을 지향하는 근대적 서사를 반복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성장을 새롭게 규정하기보다는 그 단어가 가진 전제를 해체하면서 발견되는 요소들을 들여다보는 방식을 선택했다. 성장을 자연 생태계에서 발견되는 순환과 반복에서 드러나는 생명력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성장 개념보다 한층 유연하고 느슨하면서 동시에 생명력을 강조하는 태도이며, 동시에 무분별한 성장으로 인해 소외된 여러 감각들을 회복시킴으로써 다른 차원의 살아 있음에 주목하도록 한다.
***
이윤숙의 작품은 폭설로 인해 훼손된 나뭇가지에 주황색 레진으로 얼굴 형상을 더하여 인체를 연상시킨다. <서성이는 영혼>이라는 작품명에서 전달되는 것처럼, 그 얼굴은 반듯하기보다는 일그러져 생기를 잃은 채 상실감과 공허함을 자아낸다. 작가는 소나무 옹이들을 모아 형형색색 채색하여 그것을 마치 열매가 나뭇가지에 열린 것처럼 매달았다. 새로운 가지가 성장하기 위한 지지대 역할을 하는 옹이를, 생명을 잃은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다는 행위를 통해 또 다른 생명의 에너지를 부여하는 듯 보인다.
전시 공간에는 김영은과 협업한 영상 작품 <아이온>이 함께 상영되는데, 영상 속 변화하는 그래픽 이미지와 반복되는 소리는 이 나뭇가지들이 가진 생명에 또 다른 에너지를 전달하는 시도와 맞닿아 있다. 훼손된 나뭇가지를 다시 되살리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단절된 시간을 회복하고 생명력을 이어나간다. 이윤숙은 버려지거나 소외된 것들에 새로운 조형적 요소를 덧대어 존재를 회복시키고자 시도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제작 과정이라기보다 반복적인 행위를 통한 존재의 치유와 회복의 수행적 과정으로 보인다.
박재연의 <inout_유연한 덩어리_108>에서 포착되는 유연한 구리 선의 이미지는 마치 물이 흐르거나 구름이 바람에 떠다니듯 생동감 있는 리듬을 보여준다. 자신의 작업을 ‘내면읽기’라고 표현한 것처럼 작가는 자연의 이미지들을 관찰하고 이를 내면의 심상과 연결시킴으로써 유기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개별 작품들은 덩굴이 자라나는 것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며 리드미컬한 궤적을 만들어낸다. 이 선들은 식물의 줄기나 뿌리가 가진 선에서 출발하여 증식하는 이미지를 연상시키면서도 고정된 성장의 의미가 아니라 유연한 변화의 이미지를 내포함으로써 자연의 생명력을 표상한다.
전시장 벽에 그림자로 투사된 선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또 하나의 차원을 통해서 대상의 유기적 흐름을 보여준다. 실제 작품의 형태를 그대로 비추면서도 느슨하고 추상적으로 감각되는 이 이미지들은 빛의 각도와 지나가는 관객 등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끊임없이 변주된다. 이러한 여러 겹의 레이어는 작품이 지닌 다층적이고 유연한 변화의 과정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 자체로 생명력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전달된다.
이번 2인전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그 자체로 자연의 생명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 역시 성장을 의미를 재고하는 전시 주제와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전시는 고정적이거나 완결된 형태가 아니라 주어진 공간에 맞게 개별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형태와 의미로 변화하는 감각적 경험이 된다.
* 2025년 11월 15일 작성.
** 이 글은 2025년 11월 29일부터 12월 13일까지 도암갤러리에서 개최된
2025년 한국여류조각가회 정기전 《풀어 엮는 시간》전의 비평가 매칭프로그램으로 기획한 이윤숙, 박재연 2인전 《흐르며 뻗어나가는》전의 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