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 속 안전지대를 찾아서
Finding a safe haven amid uncertainty







김가은

  매끄럽지만 기괴하다. 어둠 안에 곳곳마다 특유의 유쾌함이 심어져 있다. 이 감각이 재료의 물성에서 오는 것인지 대상의 형상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선명한 색채에서 오는 것인지 판단을 유보한 채 잠시 동안 멍하게 비어있는 공간을 감지하게 된다. 작품은 관람자의 시선을 강렬하게 포착하지만 이내 놓아버린다. 익숙한 상징과 알레고리들로 인해 쉽게 다가가지만 한층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전진을 허락하지 않는다. 명쾌하게 해석이 될 것 같은 그 순간에 항상 미끄러질 위기 속에 놓이는 것이다. 그러고는 또다시 작품은 관람자의 시선을 붙잡아 놓는다.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쪼개어 마주하기
  김용경은 2003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개최된 개인전 《김용경 개인전: 카무플라주 만들기》(대안공간 루프, 2003.11.28.-2003.12.26.) 이후, 14년 만에 《몸, 마음, 그리고 생각》 (웅갤러리, 2017.11.24.-12.9)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는 <푸른색 머리 위>(2017)라는 강렬한 코발트블루 색으로 뒤덮인 178cm 높이의 거대한 인체 두상이 설치되었다. 이 작품의 얼굴에는 코, 입, 귀는 있으나 눈이 없고, 차갑지도, 그렇다고 따뜻하지도 않은 무표정을 하고 있다. 같은 공간의 마주하는 흰 벽에는 흐릿하고 탁한 푸른빛으로 인체 형상이 그려져 있다. 크고 단단하게 제작되어 존재감을 과시하는 머리와 대조를 이루며 몸통은 바로 사라질 것처럼, 마치 물질이 없는 영혼인 것처럼 희미하게 색을 보여주면서 전시장 한 벽면에 두 발을 온전히 딛지도 못한 채 간신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머리 위에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투명한 새가 두 마리씩 네 쌍을 이루고 있고, 머리가 없는 몸의 어깨 위에도 역시 두 마리의 투명한 새들이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날아가려는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몸이 없는 머리는 행동할 수 없고, 머리가 없는 몸은 방향을 결정할 수가 없다. 곁에 있는 투명한 새들만이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서구 철학에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이분법적 사고 체계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일찍이 플라톤은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켜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보면서 열등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17세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언명을 통해 영혼을 숭배하면서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을 공고히 했다. 19세기 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러한 데카르트주의를 비판하면서 멸시되었던 육체의 지위와 가치를 회복시키고자 하였다.[1]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통해 정신이나 영혼이 아닌 몸을 하나의 “거대한 이성”으로 보면서 육체와 영혼에 대한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켰다.[2]
  머리와 몸을 물리적으로 분리시키고 이 둘을 같은 공간에 병치시키는 김용경의 수사법은 어렵지 않게 이러한 논의들을 환기시킨다. 작가에게 이 분리는 역설적이게도 흔들리는 에고를 통합적으로 재인식하기 위한 분석적인 접근이었다. 몸, 마음, 정신, 생각, 이성, 지성, 신념 등 나를 나로 있게 한다고 믿었던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실타래를 풀어내고자 그는 각각의 요소들을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재구축하는 것이다. 그렇게 애써 만들어 놓은 경계를 통해 그 경계에 의해서 규정된 개념들에 대해서 재고하게 된다. 이와 같은 태도는 작가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벽에 거꾸로 매달려 왕관을 쓴 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머리를 위로 향하게끔 들고 있는 작품 <어지럽지 않아>(2022)에서도 몸이 벽에 매달린 극한의 상황에서도 좌절하고 무너져버리지 않도록 머리는 곧게 들면서 머리와 몸통을 떨어뜨려 놓는 분리의 전략을 취한다.  

중력에 대항하여 버티기
  분리의 전략에서 파생된 머리 없는 몸이나 몸통 없는 머리 형상은 김용경의 작업에서 큰 축을 이룬다. <나는 절대로 당신에게 무릎 꿇지 않을 것입니다_보라색>(2020)은 땅에 두 손을 짚고 무릎을 꿇어 좌절한 모습으로 몸을 숙이고 있는 푸른빛이 강렬한 보라색의 인체 조각 작품이다. 상체에서 하체로 이어지는 매끄러운 곡선은, 유리처럼 투명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액체 상태를 그대로 고정시킨 듯 보이는 우레탄 레진이 가진 물성을 극대화시킨다. 이 작품에도 역시 머리가 없다. 그 아래의 신체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재료와 색채에서 오는 영롱함으로 형상의 기괴함은 상쇄되며, 자연스럽게 내러티브가 떠오르고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탄생한 심상이 담긴 이 작품은 관람객의 몰입으로 재탄생된다. 이 인물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을 수도 있고,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악에 받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세우고 세상을 노려보는 표정일지도 모른다. 
  1878년 영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가 연속 촬영 장치를 통해 말이 달릴 때 네 다리가 떠 있다는 것을 밝혀냈던 움직이는 말(The Horse in Motion)의 사진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은 무릎을 꿇기 직전 온 몸에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그 찰나를 포착하고 있다. 연속적인 모션의 한 장면을 캡쳐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눈앞에 내러티브가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머리 없이 물구나무를 서 있는 <나를 지탱하는 것은 나의 눈물>(2021)의 제목을 통해 이 액체가 눈물을 표현한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땀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온몸으로 땀과 눈물을 흘리며 가녀린 팔과 다리로 겨우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흔들리는 신념의 벽에서>(2021) 역시 두상 없는 인체가 힘겹게 벽을 타고 올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좌절의 순간에, 신념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그 순간에도 주저앉거나 삶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불안에서 탈주하기
  김용경은 작품을 통해서 불안과 공포를 잠식시킬 수 있는 여러 장치들을 마련하는데, 그 중 하나가 어디론가 떠나는 주제이다. 공을 위에서 누른 듯이 가로로 긴 편구(偏球) 형태를 만들고 그 아래에 두 개 혹은 세 개의 팔이나 다리를 붙인 <Colored voyagers>(2021-22) 시리즈, 그리고 그 편구를 새가 붙잡고 날아가는 형상을 한 <아무것도 없이 떠나는 여행>(2020), <생각의 모험>(2020) 등이 그것이다. 열기구, 지구본, 새장 등을 연상시키는 철사로 제작된 이 편구 중앙에는 엄지손가락의 길이보다도 짧은 투명한 인간의 머리가 박혀 있다. 이 작은 머리는 50cm 이상 되는 편구 철사 구조물로 부풀어 올랐다. 언제든지 불안한 현실 세계를 벗어날 수 있도록 아주 기본적인 골격만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것은 새에 의지해 여기저기를 떠도는 형상을 하고 있기도 하고, 팔이나 다리가 달린 <Colored voyagers>처럼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 같은 귀여운 괴생물체가 알록달록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날렵한 다리로 재빠르게 달려가다 편구 부분이 풍선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갈 것 같은 환상을 그리게 된다. 
  이렇게 금방이라도 날아가 사라질 것 같은 가벼움은 <내가 옳았다고 말해줘>(2018), <원형에 매달린>(2018), <바람을 가짐>(2018) 등 공기가 가득 찬 비눗방울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에서도 나타난다. <임시대피소>(2020) 역시 이러한 시리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관람객이 직접 그 공간 안으로 머리를 넣어볼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지름 50cm 남짓의 옅은 초록빛을 띠는 작품 안에 머리를 넣어보면 마치 물속으로 들어간 듯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외부 환경이 미미하게나마 차단된다. 이 좁은 공간은 갑작스럽게 닥치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현실을 차단하고 잠시 동안이나마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지대 역할을 한다. 

꿈과 현실 넘나들기
  김용경의 작업의 특징 중 하나는 과일, 뿔, 깃발, 왕관, 날개 등 상징과 알레고리들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눈물 말고 뿔>(2015)은 우레탄 레진으로 제작된 투명한 인체 두상이다. 눈 부분에 뿔이 튀어 나와 위로 향하고 있다. 뿔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뿔은 염소나 사슴 등 초식동물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무기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방어의 수단이자 힘을 과시하는 공격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만과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눈물이 흘러야 상황에서 그것을 뿔로 대체시킴으로써 나약하고 슬픈 모습이 아니라 분노가 담긴 좌절감으로 표출된다.
  <풍요의 여신>(2016), <Rusty Atlas>(2022) 등의 작품에서는 그리스 신화 속 상징들이 등장한다. 신작 <이켈로스와 판타소스>(2022) 역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켈로스(Icelus)와 판타소스(Phantasus)는 잠의 신 힙노스(Hypnos)의 아들로 꿈을 관장하는 신들이다. 전자는 동물을, 후자는 무생물(inanimate things)의 형상을 꿈에서 만들어 낸다. 금박을 한 몸통 위에 각각 머리 대신 날개를 펼친 새와 산호를 얹고 있는 이 작품은 상상 속에 존재하거나 신화 속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처럼 머리 대신 새나 산호와 같은 동식물 등이 자리를 잡아 신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처럼 김용경은 현실에서 마주하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전략으로 꿈이나 신화 속의 비현실적인 소재들을 취한다. 꿈을 관장하는 신들을 형상화시킨 것은 그러한 연유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과 어떠한 방식으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꿈은 엄밀하게 말해서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곳은 또 하나의 현실로 작품을 통해  그에게 안식을 주는 공간이 된다.
  앞서 2017년의 개인전을 소개하며, 그것이 14년 만에 열린 것임을 강조하였다. 무엇이 그를 다시 미술현장으로 도달하게 한 것일까. 바실리 칸딘스키는 저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종교, 과학, 도덕 등이 (이 마지막 것은 니체의 강력한 손에 의해서) 흔들릴 때, 그리고 외적인 버팀목이 무너질 것 같을 때, 인간은 시선을 외적인 것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고 설명했다.[3] 칸딘스키의 이 문장은 가치관의 혼란과 외부 환경에 대한 불안 속에서 창작활동을 재개하게 된 김용경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단서를 제공한다. 



  • [1] 프리드리히 니체, 이진우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휴머니스트, 2020, 1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 “4.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ePub 전자책.
  • [2] 이러한 태도는 “몸은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며, [...]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도 그대 몸의 도구이며, 그대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고 장난감이다”라는 부분에서 잘 나타나 있다. 위의 책.
  • [3] 바실리 칸딘스키, 권영필 옮김,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Uber das Geistige in der Kunst)』(1912), 열화당, 2010, p. 40. 



  • * 2023. 1. 31 작성.
  • ** 이 글은 웅갤러리가 제작한 Yongkyoung Kim: Archive 2003-2023』(웅갤러리, 2023)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