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심(黑心): 과정으로서의 추상








김가은


  송지인의 드로잉 속의 선들은 마치 중력이 없는 우주 공간을 떠다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응시하고 있으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연필의 소리나 종이를 스치는 바람이 생생하게 감각되는 착각을 하게 된다. 작품을 접했을 때 경험하는 이러한 다감각적 자극과 그로 인한 가벼운 인지적 부조화감은 이내 비규칙적인 입자들의 움직임, 혹은 진동이나 파동과 같은 이미지들로의 치환과정을 통해 안정되면서 특유의 운동성만을 감지하게 된다.
  공간지은에서 개최되는 송지인 개인전 《흑심》은 지금까지의 작가의 작업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기존에 작가가 동식물이나 인간 신체의 부분들을 변형하여 부분적으로 배치하거나 여러 요소들을 이질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시적이면서도 서사적인 방식으로 입체작품을 통해 자신의 작업 세계를 구축해 왔다면, 이번 전시는 초심으로 돌아가 연필 드로잉으로 지금까지 구축해온 견고한 작업 세계를 풀어보려는 시도이다. 2021년 개최된 송지인 개인전 《푸른 소요》에서는 주로 손을 비롯한 신체 일부나 가면, 원피스, 날개 등의 상징물을 통한 서사성이 강하게 드러났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손이 가는대로 자유롭고 유연하게 그린 드로잉 작품이나, 그것을 세라믹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구상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폴리크롬에서 흑색의 모노크롬으로, 입체적인 것에서 평면적인 것으로의 변화들이 관찰되는 것이다.
  특히 추상적인 것으로의 변화는 독일의 미술사학자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가 말한 추상충동 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는 추상충동을 예술창작의 근원으로 보고, 그것이 외부의 현상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인간 내면의 거대한 불안의 결과라고 설명하였다.[1] 그 과정에서 보링거는 인간이나 자연물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감정이입을 통해 미적경험을 설명한 테오도르 립스(Theodor Lipps)의 감정이입충동을 추상충동의 정반대에 위치시켰다. 보링거에게 추상이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직선이나 기하학적인 선을 가리키는 것인데, 추상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송지인의 작업과는 거리가 있다. 송지인의 드로잉은 간혹 대칭적이거나 직선이 반복적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매우 유동적이고 생명력을 발산하며 불규칙적이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élix Guattari)의 이론으로 확장시켜 이해해볼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보링거에 의해서 이분화된 두 가지 추상의 연결성을 주장하면서 그것을 “일종의 리좀(rhizome)”이라고 설명했다.[2] 이들에 의하면 추상적인 선은 “어떠한 제한 없이, 어떠한 윤곽도 묘사하지 않는 선, [...] 항상 방향을 바꾸며 외부나 내부도, 형태나 배경도, 시작도 끝도 없이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살아 숨쉬는 선”이다.[3] 이것이 글의 앞부분에서 설명한 ‘특유의 운동성’, 즉 정체되지 않고 증식하는 듯하며 어디로 향하는지 추측하기 어려운 생동하는 감각과 맞닿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작업실에서 출발한 공간지은이라는 전시장의 특성과도 연결되면서, 완성된 결과물보다는 작가가 작업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것은 아직 굳어지지 않았고, 완결되지 않았으며, 이후의 향방을 기대하게 한다. 이 전시 자체가 작가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실험적인 ‘드로잉’인 것이다.


  • [1] Wilhelm Worringer and Hilton Kramer, Abstraction and Empathy: A Contribution to the Psychology of Style(Chicago: Ivan R. Dee and Elephant Paperbacks, 1997[1908]), p. 15.
  • [2]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Minneapolis; Lond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1980]), p. 415.
  • [3] 위의 책, pp. 497-498 (강조는 원문).



  • * 2023년 4월 10일 작성
  • ** 이 글은 2023년 4월 19일부터 5월 9일까지 공간지은에서 개최된 송지인 개인전 《흑심》전의 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