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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에서 데이터로, 그리고 회화로
From Image to Data, to Painting
김가은
캔버스 위에 각기 다른 투명도를 가진 여러 색의 물감이 겹겹이 쌓인다. 원이나 선과 같은 기하학적 조형 요소가 반복되며, 복제 가능한 디지털 공간을 연상시키는 화면을 구성한다. 추상회화 작품에서 드러나는 수행성이나 물질성을 절제하고, 가까이서 직접 보지 않으면 디지털 이미지를 프린트한 것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화면을 균질하게 구성하여, 시각 외의 다른 감각들을 최소한으로 자극한다. 어떤 것이 지나간 흔적인지, 무엇인가 흔들리는 상태인지, 데이터로 치환된 특정 의미 단위인지 모호한 채로 이 조형 요소들은 경계를 흐리거나 혹은 반대로 강조하면서 화면 속을 부유한다. 물리적 현존성이 결여되고 비선형적인 시간성을 지닌 디지털 환경을 시각화한 캔버스 너머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포착할 수 있을까.
소실되는 기억에 대한 불안
설고은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느끼는 상실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불안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을 데이터화하여 회화에 반영한다. 그의 기억은 과거의 사진이나 영상, 때로는 지인과의 문자메시지 내용 등을 매개로 구축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품은 컴퓨터에 파일을 복사하여 저장하듯 파편화되어 흐릿해진 과거의 기억을 화면 속에 붙잡아 두려는 열망을 드러낸다.
<찾을 수 없는 너의 흔적을 찾아 조슈아 트리 공원을 검색하지만 유튜브의 짧은 영상들은 끝없이 돌아가는 회전문처럼 연결되지만 연결되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나를 인도한다>(2022-24)에서는 소통의 단절감, 디지털 알고리즘의 무의미한 반복성, 방향성을 잃은 수동적인 태도,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는 또렷하지 못한 의식 상태 등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작품은 20개의 레이어가 쌓인 112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것으로, 각 레이어에는 컬러코드, 형태, 투명도 등의 정보 값이 지정되어 있다. 복제성, 반복성, 투명성 그리고 광학적 효과 등 디지털 이미지가 가진 특징을 강조하는 이 추상회화는 정교한 붓질과 에어브러시를 통해 만들어진 작가의 시간과 손길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아무리 치밀하게 새겨놓는다고 할지라도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기란 쉽지 않다. 기억은 시각 이미지를 단순히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 등 몸의 여러 기관을 통해서 감각된 것들이 다양한 감정과 함께 복합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에 가깝다. 망각하고 있던 이미지나 감정이 특정 향기나 소리에 의해 소환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으며, 그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지속적으로 재편되는 가변적인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특성은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을 과거 사건의 재현이나 정보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삶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던 관점, 그리고 한병철이 『서사의 위기』를 통해 기억은 경험한 모든 것의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사건들을 새롭게 연결하고 재구성하는 서사라고 표현한 부분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1]
설고은의 작업은 기억을 데이터화하고 이를 회화작품에 기록함으로써 소실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는 행위가 맥락을 잃은 기억의 파편들을 구성하는 단편적인 정보의 축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되새기며 데이터화하여 재구성하는 이 일련의 과정은 기억이 소실될 시점을 한 번 더 유예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들을 처리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휴대폰에 쌓아두고, 불필요한 문자메시지와 파일까지 모두 강박적으로 백업시켜 놓음으로써 경험과 기억을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다고 무심코 판단한다. 그것은 일상 속 경험들을 기록하고 저장하는 활동, 어쩌면 때로는 기억 그 자체까지도 디지털 공간에 위임하는 것이다. 파편화된 기억을 붙잡으려는 시도가 불가능할 것임을 알면서 작업을 지속하는 설고은의 추상회화를 마주하면, 평범하게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기억이 가진 무게감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된다.
디지털 시대의 정서적 공허
디지털 매체를 통해 멀리 떨어진 타인과 소통할 때 대면으로 소통할 때와는 다른 상태를 경험한다. 아무리 서로의 일상을 촘촘하게 공유하더라도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과 같을 수 없으며, 일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게 되어 결국 허무함과 상실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상태를 “기만적”이라고 표현한다. 디지털 매체는 즉각적이고 편리하여 상대방과의 물리적 거리를 자각하지 못하게 만들지만 실제의 감각적 경험은 불완전하다. 완전한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며, 이는 단순한 상대의 부재를 넘어서는 강렬한 정서적 결핍으로 이어진다.
디지털 공간에서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방대한 양의 이미지와 데이터가 끊임없이 교체되며, 이전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의 흔적이 잔상으로 남는다. 특별한 행위를 수행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하나로 대체되는 것은 너무나 흔하며, 원치 않는 이미지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순간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디지털 환경에서 이미지의 교체는 일상적인 현상이 되었다. 설고은의 <로딩을 기다리는 중의 로딩을 기다리는 중의 로딩을 기다림>(2021)이나 <새벽 3시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보여줬다 재생했다 이어졌다 확산했다 연결했다 단절했다 다시 시작한다>(2021)는 그러한 디지털 공간 속 움직임과 잔상을 시각적으로 포착한다. 이 작품들은 앞서 소개한 작품과 시각적으로는 유사하게 여러 크기와 색깔의 네모나 불규칙적인 곡선 등의 조형 요소들을 여러 겹 쌓아 올려 심연을 알 수 없는 가상현실을 표현한다. 작품의 제목에서도 보이듯이 디지털 경험의 무의미한 반복성, 덧없음, 그리고 단절감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디지털 환경에서의 경험은 종종 수동적이며 방향성을 잃기 쉽다. 이러한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주의력이 분산되고 무기력해진다. 이는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의 이론을 상기시킨다. 그는 『사물과 비사물』에서 기술 발전이 가져온 상황을 묘사하며, 정보라는 비사물이 기존에 중심적이었던 사물들을 몰아내고 환경을 장악하려 하는 시대적 변화를 통찰력 있게 분석했다. 플루서는 컴퓨터 메모리와 같이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비사물이라고 보았고, 비사물이 중심이 된 미래의 사회에서 손은 탐색도, 창조도 할 수 없게 되어 단지 잉여가 될 뿐이라고 경고하면서, 비사물적인 미래의 인간은 타자기나 피아노의 키를 누르는 손가락 끝 덕분에 현존할 것이라고 상상했다.[2] 그 모습은 하루 종일 손가락 끝으로 휴대폰의 터치스크린을 쓸어 올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현대인의 일상과 놀랄 정도로 맞닿아 있다.
디지털 공간과 그 너머의 회화
설고은은 동시대의 디지털 환경이 초래하는 상실감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빠르게 변화하고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로 인해 영향을 받는 인간의 인식 체계를 심도 있게 탐구하는 연구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특히 비물질적인 디지털 환경과는 대조적인,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물성을 지닌 회화를 매체로 선택했다는 점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초기 작업이 디지털 시각언어가 회화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디지털 기술과 함께 자라온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서, 인터넷 화면의 지나치게 선명한 색상과 회화작품에서 나타나는 색감 사이의 괴리를 체감했다. 이러한 주제는 그가 작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여러 단계를 거치며 지금의 작품에 이르게 되었다. <God from the Machine>(2018)에서 그는 디지털 시각 매체의 특징을 보이는 선과 색으로 구성된 추상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금속 소재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인간 형상을 표현하여 구상과 추상이 혼재된 특성을 드러냈다. 이후 작가는 특정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재현적인 회화보다는 디지털 공간을 경험하며 생겨나는 혼란스러운 정서 그 자체를 표현하고자 구상적 요소들을 배제하고 완전한 추상으로 나아갔다. <Spaced I>(2019)에서 원, 사각형, 그리드 등 적극적으로 기하학적인 도형을 사용하여 디지털 가상공간을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최근의 작업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그의 최근 작품들은 기하학적 도형을 비롯한 여러 조형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레이어들을 쌓는다는 점에서 이전 작업과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usually summer>(2024)와 <aging simulator>(2024)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물리적으로 축적되는 레이어의 시각적 효과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각 레이어들이 가지는 표현의 질감은 거칠기도, 매끄럽기도 하며, 유광과 무광을 모두 사용하면서 두께 역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일관된 질서와 패턴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곳곳에서 균열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전의 작품들이 비교적 투명한 레이어를 통해 점멸하고 부유하는 이미지들을 표현했다면, 최근 작업들에서는 좀 더 진하고 두터운 레이어로 구성된 색과 색 사이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진동의 이미지를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시한다.
디지털 시각 환경이 회화라는 전통매체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통해 회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설고은의 작업은 다층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에 전통매체인 회화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동시에, 물질과 비물질, 가상과 실재, 영속과 소멸, 연결과 단절과 같은 주제들이 마치 레이어가 많은 그의 회화처럼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작가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규칙적인 조형 요소들과 그것의 균열에 주목하며, 이를 통해 질서와 혼돈사이의 긴장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데이터화된 이미지와 그것의 레이어가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그 속에 자리한 혼돈과 불안은 부유하거나 진동하는 감각으로 전이되어 보는 이들에게 더욱 깊은 정서적 교감을 불러일으킨다.
[1]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카넷, 2005; 한병철, 『서사의 위기』, 최지수 옮김, 다산북스, 2023, p. 83.
* 이 글은 2024년 12월 20일부터 2025년 1월 5일까지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개최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신진작가 특별전 《Lost & Found 다시-찾기》전 도록에 실린 설고은 작가에 대한 평론이다. (2024 SNU Art & Design Magazine No.2, pp.5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