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핑풍납2022: 풍납을 잇다 + □을 지켜보는 이들을 위한 제안서






김가은


처음에 별 특징이 없던 공간은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됩니다.

이-푸 투안(Yi-Fu Tuan), 『공간과 장소』(1977)





풍납의 현재
《매핑풍납2022》은 현재의 풍납동을 둘러싼 쟁점을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풍납동은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11호 ‘서울 풍납동 토성’이 소재한 곳으로, 토성의 내부가 이미 마을을 이루고 있어 문화재 보존과 주민생활권 보장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지역이다. 1997년 현대건설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백제 초기의 중요한 유물이 발견되면서 풍납동 일대 발굴조사가 본격화되었고, 이후 풍납토성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 받으면서 문화재 복원사업이 대규모로 추진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보상 절차를 통해 매입된 토지 위의 건물들이 철거되어 지역 내 매입지들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부지 중 일부는 거주자 우선 주차장으로 활용되거나 소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정원처럼 꾸며졌지만, 많은 경우 풍납동 토성이나 발굴된 백제 유물을 연상시키는 상징물이 그려진 소위 “문화재 펜스”를 세우고 주민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공터로 방치되어 있다. 풍납동에서 일상을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중장비와 철거 현장은, 탁 트인 하늘과 잘 가꾸어진 풍납토성 산책로와 모순적으로 병치된다.
  이 프로젝트는 2000년 전 과거를 되살리는 데 초점이 맞춰진 문화재 복원을 추진하는 입장과 개발이나 토지매매를 통한 미래의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태도들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갈등 상황보다는 일상에서의 “풍납의 현재”에 주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에 따라 풍납동의 현재 모습을 주민들과 함께 작품을 통해 기록하는 《풍납을 잇다》와 풍납동 문화재 매입지의 현재의 상황을 조사・연구하고, 지역 내 유휴공간을 활용할 것을 제안하는 《□을 지켜보는 이들을 위한 제안서》로 구성하였다.

풍납을 잇다
주민참여형 전시 《풍납을 잇다》는 현재 풍납동의 모습을 예술 작품을 통해 기록한다. 내일이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공간, 나에게 특별한 추억이 있는 장소, 혹은 어제 사라져버린 건물의 터를 작가와 주민이 직접 그려보는 것이다. 2022년 8월, 풍납동 주민이나 생활권자들을 참여자로 모집하였고, 총 여섯명의 참여자가 모이게 되었다. 이 전시에 참여하는 백연수, 한연선, 최지영 작가는 모두 풍납동에서 전시를 개최한 경험이 있다. 참여자들은 각각 두 명씩 먹 드로잉, 목판 드로잉, 펜 드로잉으로 나뉘어 한 달 이상의 기간 동안 4회에 걸친 워크샵을 통해 작품 제작 단계부터 설치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작가와 함께 하였다. 
  동양화를 전공한 한연선 작가와 함께 작업한 먹 드로잉 팀의 박현주, 안소연 참여자는 풍납동에서의 기억과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작품에 담았다. 자주 놀러가던 아들 친구의 집이 철거된 터를 그린 안소연의 《자리의 기억》(2022) 연작은 이렇게 주민의 삶의 터전이 철거되고 있는 풍납동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많은 추억들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없어져서 마음 아팠던 걸 작품으로 표현해보고 싶다”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면서도 그곳에서 추억을 쌓았던 아이들의 이름과 희망적인 문구들을 작품에 써 넣고 담담한 필체로 풍납동을 묘사하였다. 박현주는 “주변에 하나씩 사라지고 거기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떠나고 며칠 만에 가보면 집이 없어지고 하는 것을 작업으로 표현”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며, <빈집>(2022)을 통해 풍납토성의 테두리 안에 풍납동 하면 떠오르는 개인적인 경험 속의 상징물들을 배치하였다. 그가 유쾌하게 표현한 풍납동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한연선은 참여자들이 촬영한 사진과 풍납동에서 자주 목격되는 펜스를 소재로 <단정한 잔해>(2022)와 <펜스 너머>(2022)를 제작하였다. 무채색의 먹이 보여주는 다소곳한 이미지가 일견 정적으로 보이는 듯 하다가도, 잔잔한 펄이 자아내는 반짝이는 생동감이 참여자들의 작품에 나타난 밝은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먹 드로잉 섹션의 전시장 벽면은 다층적인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목판 드로잉 팀의 남주희, 정혜윤 참여자는 나무 조각 작업을 해 온 백연수 작가와 함께 <풍납 identity>(2022)라는 공동 작업을 통해 “문화재, 유적, 서성벽, 왕성" 등과 같이 풍납동에서 자주 목격되는 단어들을 목판에 새기고 이를 종이와 천에 찍어내는 타이포 기반의 작업을 제작했다.  “풍납동에서만 볼 수 있는 타이포가 많다”라고 설명한 남주희의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한 이 공동 작업은, 목판화라는 매체 자체가 가진 거칠고 투박한 질감이 발굴조사와 철거공사를 멈추지 않는 풍납동의 특수한 상황과 겹쳐지면서 그 특유의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시킨다. 정혜윤은 <거목>(2022)에 대해, 워크샵 첫날 “동네 탐방에서 굉장히 오래된 고목이 인상적이어서 그것을 표현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그렸다"고 이야기하며 오래된 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백연수는 <mapping 풍납>(2022)을 통해 첫 워크샵에서 팀원들과 동네를 함께 탐방했던 발자취를 풍납동 지도 위에 선과 점으로 오버랩 시킴으로써 풍납동에 대한 인상을 경험적으로 담았다. 이 목판 드로잉 작품은 평면적인 풍납동의 지도 주변에 하늘과 물이 흘러가는 형상을 새겨 넣어 채색한 것으로, 풍납동 토성의 내부에만 주목하는 좁은 시선을 보다 입체적으로 확장시킨다.
  펜 드로잉 팀의 공유선, 김현순 참여자는 최지영 작가와 함께 펜과 수채화 물감으로 작업하였다. “풍납동에서 직장을 다닌 지 15년이 되었다”는 김현순은 이곳을 자신이 사는 곳처럼 자주 드나들었다고 이야기하면서 <현대 봄>, <현대 여름>, <현대 가을>(2022) 연작을 통해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풍납의 모습을 그렸다. 공유선의 <282-1 in>과 <282-1 out>(2022)은 영어체험 마을로 활용되던 붉은 벽돌 건물을 그린 작품이다. 자신의 아이들이 풍납동에 살면서 드나들던 영어체험 마을에서의 추억을 그리워하면서 그는, “지금은 닫혀 있어서 다른 용도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설명한다. 최지영은 풍납동을 기록하는 두 참여자의 손을 스케치하여 풍납동을 기록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외부인인 작가 자신의 시선을, 《기록하는 손》(2022) 연작을 통해 보여주었다.

□을 지켜보는 이들을 위한 제안서
독일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사회참여적(socially engaged) 예술과 디자인을 실천하는 콜렉티브 DGRG는 풍납동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김가영과 그가 유학중 함부르크에서 만난 리사 보이틀러 (Liza Beutler), 닉 크레이븐(Nick Craven), 티나 헨켈(Tina Henkel), 총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사회참여적인 프로젝트를 통해서 도시 속 공적공간을 공공재로 인식하고 이를 민주적이고 자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대표적으로 현재 함부르크에서 진행중인 <제르비어포슐락 Serviervorschlag: 잊혀져가는 도시 이미지들에 대한 프로젝트> 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철거 예정인 건물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의미와 배경을 연구하고 지역 커뮤니티와 소통함으로써 그 공간이 가진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현대 사회의 도시계획과 무분별한 개발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도시공간의 사회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며, 그 도시 속 공적공간을 대하는 이러한 작가들의 태도는 매핑풍납2022 프로젝트의 두 번째 전시 《□을 지켜보는 이들을 위한 제안서》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들은 약 2주 동안 풍납동에 머물면서, 철거되었거나 철거 예정인 공간들을 조사하여 이곳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살펴보고 이를 기록한다. 사적지로 지정된 공간의 공공성을 재고하고 이곳에서 생활하는 풍납동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이 공간들의 활용방안을 모색할 것을 제안한다.
  주민의 인구가 감소하고 상권이 침체되면서 전부 표면화될 수 없을 만큼 여러 입장들이 얽혀 있는 이 지역의 무게감과는 대조적으로, 퍼포먼스를 통한 이들의 제안방식은 유쾌하고 명료하다. 작가들은 문화재 펜스와 동일한 사이즈의 주황색 펜스 모형을 제작하고 원본 펜스에 새겨진 수막새, 토기 등 문화재와 관련된 픽토그램을 모두 테니스 라켓, 운전대, 모종삽 등 현대사회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치환시켰다. 이렇게 제작된 네 개의 펜스는 퍼포먼스를 위한 임시 무대가 되었다. 사적 매입지 위에 조성된 풍납백제문화 공원과 동성벽공원에서 진행되었던 두 차례의 퍼포먼스에서 작가들은 비둘기 가면을 쓰고 상・하의를 주황색으로 맞춰 입고 등장한다. 펜스에 부착된 일상의 아이템들을 탈부착하면서 관객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들을 비언어적인 몸의 움직임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전달한다. 
  퍼포먼스에 사용되었던 강렬한 주황색 펜스가 전시장의 조명 아래 설치되면서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것은 지역 내에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문화재 펜스를 상기시키며 문화재와 관련된 문제를 공론화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 펜스 너머 코너 공간에는 풍납동 토성 둘레길을 따라 펜스를 들고 산책하는 모습을 인화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 옆 코너 하단에 앞서 설명한 약 15분 가량의 퍼포먼스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이어지는 벽면에는 작가들이 풍납동을 산책하면서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는 철거 직전 회색의 높은 펜스가 쳐진 건물, 문화재 발굴 현장, 그리고 발굴 이후 공터가 된 모습 등 그들의 시선으로 본 2022년의 풍납동의 모습이 잘 드러나있다. 나머지 한쪽 벽에 설치된 <유적6-문화재 보호구역>(2022)은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연구 결과물이다. 지도를 통해 문화재 정보를 제공하는 문화재청의 문화재공간정보서비스의 지도데이터들을 가공하여, 지금까지 확장되어 온 풍납동 내 국가 지정문화재 구역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시각화하였다.
  “네모”, “빈 칸”, “미음”, “뭐뭐” 등 읽는 사람마다 달라지는 제목에 쓰인 사각형은 풍납동 내 공터를 형상적으로 상징하는 동시에 그 공터를 지칭하는 통일된 명칭이 없음을 중층적으로 나타내는 기호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용도 없이 비어있는 부지들이 공적공간으로 인식되어 현재 이곳을 살아가는 주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공간으로 재조명되기를 기대한다. “현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남길 문화유산을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통해 작가들은 현재의 모습들이 축적되어 미래의 역사가 된다는 관점을 함축적으로 제시하면서 궁극적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 이 글은 2022 송파문화예술 활성화 지원사업 <매핑풍납2022>의 두 전시,《풍납을 잇다》와 《□을 지켜보는 이들을 위한 제안서》의 전시서문 통합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