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섞인 기억, 부유/침전하는 이미지
Stirred Memories, Floating/Settling Images
김가은
과거를 이미지의 형태 아래 떠올리기 위해서는 현재적 행동으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어야 하고, 무용한 것에 가치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하고, 꿈꾸려고 해야 한다. 아마도 인간만이 이런 종류의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앙리 베르그손, 박종원 옮김, 『물질과 기억』, p.144
이지수는 과거의 경험이나 사건, 꿈이나 매체에 등장하는 장면 속의 이미지, 색, 소리, 인물 등에 대한 기억을 매개로 내면의 의식을 탐구한다. 그는 투박한 윤곽으로 인물이나 사물의 형태를 잡고 특유의 색감을 통해 인물이 지닌 감성을 평면에 담아내거나, 입체적인 형태를 만들어 표현한다. 비교적 느슨하게 구체화된 작품 속 인물들은 비일상적인 구도 속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와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 1859-1941)은 『물질과 기억』(1896)을 통해 정신과 물질의 실재성과 그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기억’에 대해서 고찰한다. 그는 ‘습관-기억(souvenir-habitude)’과 ‘이미지-기억(souvenir-image)’이라는 두 가지 기억으로 분류하여 이 두 개념을 학과의 암기와 독서에 빗대어 설명하는데, 그에 따르면 ‘습관-기억’은 반복을 통한 기계적인 암기와 같은 성격을 가지는 반면, ‘이미지-기억’은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어도 각각의 경험은 일회적이고 인상적이며 고유한 특성을 지니는 것이다.[1] 그는 또한 ‘현재’라고 부르는 것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잠식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현재를 지각하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되고, 동시에 미래를 지향하게 되기 때문이다.[2] 그의 철학은 기억을 과거의 사건이나 정보의 단순한 저장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관념을 넘어서, 의식을 지속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자 미래를 지향하는 현재를 구성하는 활동으로 이해해볼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둥근 테이블에 여덟 인물이 둘러 앉아 있는 <Table for eight>(2023)에는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산비둘기, 다른 색 양말을 신던 같은 반 친구 A, 기르던 개, 그리고 과거의 자신 등이 등장한다. 같은 공간에 표정 없이 앉아 있지만 이들의 시선은 어긋나고 자세도 제각각이어서 각자의 세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인다. 테이블 위의 사물들 역시 목적 없이 무작위로 흩어져 있다. 서글픔과 아련함, 천진난만함과 유희적인 감각이 공존하면서 맥락이 해체된 채로 이들은 작가가 설정한 작품 속 테이블에 모여 있다. 이들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가느다란 실 정도이다. 실은 이들 간의 관계를 미약하게 연결시키면서 공존의 필연성을 소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로 다른 개별 기억에 시각적 상상력이 보태어져 만들어진 작품 속 인물들은 화면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작가의 현재를 재구성한다. 이 인물들은 <Going home>(2023)과 같이 다른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생산한다. 이 이미지들은 지속적으로 재맥락화되기 때문에 임시적이고, 가변적이며, 회고적이지 않다. 여러 기억들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작품 속 이미지들은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 모두에서 떠오르거나 혹은 가라앉는 활동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 ‘일렁일렁’은 본래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의태어로, “자꾸 마음에 동요가 생기는 모양”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함께 지닌다. ‘동요(動搖)’는 한편으로 불안하거나 혼란스러운 마음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으나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긍정적인 변화의 징후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뜻을 담아 이번 전시 《일렁일렁》이 생명이 움트는 봄기운과 어우러져 기분 좋은 촉매가 되기를 기대한다.
- [1]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카넷, 2005, pp.138-143.
- [2] 위의 책, p.237.
- * 2024년 4월 7일 작성.
- ** 이 글은 2024년 4월 15일부터 4월 28일까지 공간지은에서 개최된 이지수 개인전 《일렁일렁》전의 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