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동력: 처음 마주한 에너지
Energies of One's Own: First Encounters


김가은




 불확실성 속에서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저마다의 동력: 처음 마주한 에너지》는 이 질문에 대한 탐구이다. 김윤수, 송지인, 신하정, 심정은 네 명의 작가는 작업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여정을 함께 이야기하고 그중에서 자신의 추진력이 된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그 작품들과, 그 안에 응축된 에너지를 함께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부제 ‘처음 마주한 에너지’의 ‘처음’은 시간의 순서인 동시에 밀도와 강도를 나타낸다. 우리가 무언가를 처음 마주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시간상 처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어느 시기든 처음처럼 느끼게 만드는 또렷한 순간들을 강조할 때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처음은 한편으로는 작업의 출발점에 깃든 초기의 에너지를 가리킨다. 앞으로의 작업을 향한 기대와 포부, 예술가로 살아가겠다는 다짐, 스스로를 작가로 규정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작업을 쉬다가 다시 추동하게 만든 전환점, 작가로서의 내적 자각이 일어난 시기의 작품들이 지닌 에너지까지 모두 아우른다. 시기는 저마다 다르더라도 이 에너지들은 모두 작가의 작업 활동을 지금까지 이끌어 온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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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은 경계 없이 흘러간다. 바다와 하늘, 나무와 흙, 구름과 비는 각각 개념적으로 분류될 뿐, 실은 그 경계가 모호한 채 서로에게 스미며 끊임없이 순환하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이다. 경계를 흐리는 이러한 시선은 일상의 모든 영역으로까지 이어진다. 김윤수는 울트라마린 블루라는 색이 지닌 깊은 신비감을 매개로 이러한 경계에 대한 사유를 펼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네 작품 〈네 개의 구멍〉(2006), 〈표류〉(2024), 〈적막〉(2024), 〈경계선〉(2024)은 서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울트라마린 블루를 다양한 층위로 보여준다. ‘바다 저편’이라는 어원을 지닌 이 색은 무한의 저편으로 건너가는 일종의 통로이다. 작가는 아득히 깊은 ‘저편’을 암시함으로써, 물질과 비물질의 사이, 물리적 시공간의 한계에서 포착되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대상을 새로운 감각으로 바라본다. 이를테면 생명과 순환을 존중하면서 〈네 개의 구멍〉이 설치된 쪽 벽에 새겨진 글귀를 통해 경계를 흐리며 사이를 연결하는 존재를 보여주고, 〈경계선〉을 통해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고요하게 드러낸다. 그 수행적 태도는 작품과 삶이 연결되는 지점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김윤수에게 울트라마린 블루는 단지 작품의 재료를 넘어 작가가 세계와 만나는 하나의 방식이다.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드로잉의 선은 작가의 실험, 시행착오, 신체적 행위를 드러내며 작업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송지인은 상황을 통제하지 않은 채 반응하는 신체의 감각에 집중하면서 드로잉을 통해 작업한다. 시적이면서도 서사적인 소재로 입체 작업을 해온 작가는 그동안 구축해 온 견고한 작업 세계를 해체하기 위해서 2023년부터 가장 기초적이고 자유로운 매체 중 하나인 연필로 드로잉을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연장선에서 세라믹으로 제작된 입체 드로잉 작품과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 대형 드로잉 작품들을 소개한다. 
  〈드로잉 연작〉(2026)에서 거대한 종이 위에 묵직하게 올라간 목탄의 강렬한 선은 몸 전체로 수행되는 사건이 남긴 흔적에 가깝다. 작가는 이 드로잉 작품들에 대해 “통제보다는 반응”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작업은 하나의 화면에서 다음 화면으로 이어지며, 흑과 백이 주는 대비 속에서 더 큰 에너지로 다가온다. 한편 〈Ceramic 오브제드로잉 시리즈〉(2023)는 세라믹 제작에 수반되는 긴 시간성이나 매체 자체가 지닌 한계와 마주하며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작가가 만들어낸 선과 형태는 가마 안에서 수축하고 갈라지기도 하며 의도하지 않은 형태로 굳어진다. 드로잉 화면 속에서 유기적으로 흐르는 선과 반복적인 조형들이 입체화되어 응집된 이 작품은 부피와 무게를 얻는 과정을 거친다. 이처럼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두 연작은 호응하며 드로잉을 매체가 아닌 태도로서 바라보도록 한다.

  신하정은 일상의 단면이나 풍경에서 전해지는 이미지를 예민한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인다. 작가가 시베리아 횡단 여행 중 기차에서 본 풍경을 그린 〈멈추어라, 너는 아름답구나〉(2018)는 당시의 풍경을 마주한 작가의 감각에 머물게 한다. 작가는 다섯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여 세로 약 2미터, 가로 6미터가 넘는 거대한 화면 위에 유화로 광활한 겨울 숲을 펼쳐냈다. 먼 배경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반면 가까운 곳의 나무들은 띄엄띄엄 서 있어 자연스럽게 하나하나의 형태에 집중하도록 한다. 직관적인 붓질로 표현된 이 풍경 속에서 어떤 나무들은 쓰러져 있고, 어떤 나무들은 다른 나무에 기대어 포개져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주인공이 영혼을 담보로 맺은 계약의 핵심 구절을 빌려온 제목은, 달리는 기차에서 바라본 한 순간을 화면에 포착하여 정지시켜 놓는 작가의 행위와 겹쳐진다. 아름답지만 흘러가는 순간을 붙잡으려는 작가의 갈망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러나 정지된 장면은 그것을 마주하는 이들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살아나기도 한다. 작가는 2018년 전시를 회상하며, 이 작품 앞에서 여러 참여자들이 신체를 활용한 퍼포먼스를 수행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화면 속 나무들이 마치 사람의 형상처럼 다가와 신체가 움직이듯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서로 기대고 부딪히기도 하며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현대인은 끊임없는 변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반복적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키며, 내면을 응시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심정은은 물성을 중심으로 한 조각의 매체적 특성에 집중하면서 이러한 존재론적 불안에 대해 탐구한다. 
  〈세 어머니〉(2011)는 세 점의 동일한 형태로 구성된 브론즈 조각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모성과 사랑을 상징하는 어머니를 신성하게 보여주며 인간이 지닌 보편적 근원을 드러낸다. 오랜 시간을 견디는 브론즈의 물성은 모성의 영속성과 맞닿아 있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로서의 어머니는 개별성을 넘어 하나의 원형으로 다가온다. 벽에 설치된 나무 부조 작품 〈하늘〉(2011)에서는 열린 지퍼 사이로 하늘이 펼쳐진다. 본래 막혀 있는 벽은 한 공간을 다른 공간으로 열어주는 지퍼를 통해 꿈을 꾸는 것처럼 상상의 지평을 확장한다. 어머니 상에서 응축된 근원적 에너지가 다시 자유롭게 하늘로 뻗어나가는 듯하다.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불안감을 희망과 행복한 꿈꾸기라는 명제로 치환시키고 있다”는 작가의 설명은 그의 작품 세계가 지향하는 방향을 잘 보여준다. 둔화된 감각을 회복시키고 인간의 존재론적 근원을 응시하게 하며, 불안을 잠재우는 상상으로 이끄는 계기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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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을 지속하는 것은 불확실성 속에서 끊임없는 물음과 의심을 안고 가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작가라고 할 수 있는지, 지금의 방향으로 나아가도 괜찮은지, 이 작업의 다음은 무엇이 될지 말이다. 이런 의심은 시기마다 형태를 달리하며 불쑥 튀어나오고 다시 모습을 감추기를 반복한다. 비단 작가만이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이러한 순간을 마주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물음과 의심이 “의심으로부터 제외되어 있으며 말하자면 그 물음들과 의심들의 지도리라는 점에 의거하고 있다”고 쓰면서, 문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지도리들은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1] 이 비유를 빌려오자면, 흔들림 속에서는 고정된 무엇이 있어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발견되는 각자의 ‘처음 마주한 에너지’ 너머, 이번 기획에는 또 다른 ‘처음’이 겹쳐 있다. 작가들이 각자 자신을 움직여 온 동력을 꺼내어 마주보고 처음으로 서로 공유한 것이다. 작업을 지속해 오는 동안 때로는 관성으로, 때로는 눈앞의 해야 할 일들에 밀려 살피지 못했던 자신의 여정을 살펴보는 일, 그리고 작가로서 서로의 에너지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일, 그 과정 자체에 처음의 의미가 담겼다.
  네 작가의 작품들과 그 작품들을 함께 살펴보았던 경험이 바로 그 지점과 닿아 있다. 각자의 처음에서 흘러나와 어느 지점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또렷해진 에너지의 형태를 만들어내며 다음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주변과 기대어 또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묵묵히 작업을 이어 온 연속성, 그리고 서로에게 그저 그곳에 있는 고정된 존재로서 자리를 지켜온 것은 어쩌면 각자 작업을 지속해 올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동력이 아니었을까.


[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저, 이영철 옮김, 『확실성에 관하여』(341, 343절), 책세상, 2022, p.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