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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은미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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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김가은미술사무소


곳 이어지는 연
Places, Connecting Threads



김가은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곳이 있다. 유년 시절을 보낸 곳, 오랜 기간 관찰해 온 곳, 주기적으로 찾아가는 곳, 오래 머무르는 곳, 그저 마음에 그리는 곳, 그런 곳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번 전시 《곳 이어지는 연》은 김선두, 민정기, 서용선, 이종송, 정종미 다섯 작가의 시선이 머무는 장소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장소가 작품 활동을 통해 연(緣)이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연은 스치듯 가볍게 맺어지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다시 돌아가는 반복과 회귀의 과정을 통해 깊어진다. 경험과 기억이 축적되어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들은 작가의 시선이 형성된 곳, 곧 시선의 출발점이다. 반복해서 경험한 곳에서 파생된 감각과 사유가 작품에 스며들고, 그것이 확장되어 작가 고유의 관점이 형성된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 장소가 작가의 내면을 통과해 심상으로 전환되는 그 지점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


김선두는 한국화의 전통기법과 현대미술이 지닌 실험적인 감각을 한 화면에 담아낸다. 그의 작품에는 어린 시절을 보낸 전라남도 장흥의 남도 풍경이 짙게 배어 있다. 그가 그리는 고향은 단순히 과거의 추억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유년 시절을 보낸 시골은 그의 작업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미적, 감각적 중심축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원점이다. <낮별> 연작에 대해 작가는 별을 낮에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분명 존재하지만 햇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 별을 통해 인식 너머에 있는 삶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시골 밤 고개를 들면 별이 무수히 쏟아질 듯했던 밤하늘을 낮 풍경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먹을 것을 쫓는 고양이의 시선을 화면에 함께 병치함으로써 이 주제를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한다. 이를 통해 눈앞의 욕망으로 인해 우리가 무엇을 놓치며 살아가는지 되묻게 한다.

민정기는 땅과 지역의 유래를 들여다보면서 풍경을 그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작업실이 있는 양평 부근의 곡달산, 화야산, 통방산의 산세가 대규모 개발로 인해 변모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1990년대 그가 직접 산에 오르며 그렸던 <통방산> 풍경에서부터, 대규모 골프장 건설로 깎여나간 산자락을 마주하며 담아낸 최근의 연작에 이르기까지, 이번 전시는 삼십 년 이상 그곳을 탐색하고 관찰해 온 그의 비평적 시선의 궤적을 담고 있다. 작가는 골프장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 18홀 골프장인 군자리 골프장의 역사와 마주한다. 과거 순종의 첫 번째 비 순명효황후가 묻혔던 유강원 자리에 일제강점기 골프장이 조성된 것을 시작으로, 전쟁 중 비행장으로 쓰이다가 광복 이후 미군을 위한 골프장으로 재조성되고, 1973년 서울어린이대공원으로 전환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피면서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담아낸다. 나아가 작가는 서울어린이대공원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마주한 코끼리의 피부 주름이, 훼손된 대지의 단면과 시각적으로 교차하는 지점에 주목한다. 훼손된 지형과 동물의 형상을 병치하는 이 화면은,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지워진 역사와 그 자리에 남겨진 생태적 흔적을 동시에 보여준다.

서용선은 역사적 사건과 도시, 그리고 그곳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에 주목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강원도 태백 철암의 폐광촌을 그린 작품이 소개된다. 철암은 국내 최대 석탄 시설을 갖추었던 도시였으나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라 탄광이 연이어 문을 닫으면서 본래의 기능을 잃고 변모해 온 장소다. 작가는 2000년대 초부터 이곳을 찾아 그 모습을 기록했다. 한 장소를 반복적으로 방문하여 변화하는 풍경을 화면에 담고 이를 한자리에 선보이는 일은, 그 장소가 지나온 시간의 지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철암천변>에서 볼 수 있듯이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며 휘날리는 나뭇잎과 산업화로 인한 척박한 지형이 공존하는 대조적인 풍경은 작가 특유의 거친 선과 강렬한 색으로 재구성되어 그 땅이 견뎌낸 시간을 묵직하게 드러낸다. 나아가 작가가 할아텍의 작가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철암을 방문하며 지역의 역사적, 공간적 의미를 기록해 온 활동은, 하나의 장소가 예술적 연대라는 또 다른 연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이종송은 여러 장소를 찾아다니며 천연 안료로 풍경을 그린다. 히말라야와 실크로드에서부터 제주와 퇴촌 등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 장소가 지닌 자연 현상을 자신의 내부에 투과시켜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재구성한다. 제주 숲에서 시작한 작업이 퇴촌 인근 오래된 나무들로 이어져, 이번 전시에서 <동림이상(同林異想)> 연작으로 소개된다. 대형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큰 나무는 오랜 세월을 살아낸 생명을 상징한다. 제각기 다른 형상으로 뻗어 가는 가지들이 모여 서로 어우러지며 하나의 큰 생명을 이루고 있다. 가지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과 풍경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나무 주변으로 시선을 확장시킨다. 그의 작업은 항상 현장에서 출발한다. 장소가 지닌 공기의 온도, 빛, 소리 등 현장에서만 감각하고 해석한 지점을 스케치에 담아내는 것이다. 이후 작업실에서 스케치 속 현장의 감각이 여러 겹의 안료를 통해 화면 안에 천천히 자리 잡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현장 스케치와 대형 작품을 나란히 선보임으로써 현장에서 포착한 날것의 감각이 거대한 회화로 변환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정종미는 오랫동안 전통 재료의 물성을 연구하여 산업혁명 이전의 색채를 복원하고 현대화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채색기법을 재해석하여 현대 채색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왔다. 이번 전시에는 대표작 <어부사시사>를 선보인다. 제목은 윤선도의 시조에서 빌려온 것으로, 작가는 한시가 높이 평가받던 시기에 한글로 쓰인 아름다운 시조를 남긴 그의 태도에 주목하였다. 윤선도가 머물렀던 보길도라는 역사적 공간은 작가의 작업실인 서촌의 청백당과 교차한다. 작가는 윤선도의 자연 교감의 정신을 자신의 색채언어로 재구성하며 그동안 천착해온 기법을 화면에 투영한다. 그는 풍경을 하늘과 바다, 대기의 흐름이 어우러진 하나의 전체로서 감성 너머에 새길 뿐,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작업은 재료라는 날실과 작가라는 씨실이 일대일로 엮이는 과정이다. 그는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저항하는 자연 재료에 감응하며, 재료와 협업하여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전시장에는 일 년을 썩혀서 만든 밀풀로 모시를 화판에 붙이고 서른 번 정도의 채색층을 쌓는 노동집약적인 과정이 입체적으로 제시된다. 자연에서 얻은 물질과 수행적 작업 과정은 이렇게 자연과 인간이 맺어 온 또 하나의 연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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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작가가 들여다본 각기 다른 장소들은 특정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 반복과 회귀를 통해서 그곳이 어떻게 예술가의 내면을 통해 표현되었는가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어떤 장소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 그 해석과 통찰이 전시장에서 관람객의 시선과 또다시 교차하며, 관람객 각자가 지닌 고유한 ‘곳’과 새로운 ‘연’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 * 2026년 9월 9일 작성.
  • ** 이 글은 김가은과 임희정이 공동기획하고 2026년 10월 8일부터 10월 31일까지 Gallery U.H.M.에서 개최된 《곳 이어지는 연》전의 서문이다.